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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되는 구절리의 유래는 구절리에서 살았고 구절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K모씨가 제공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 구절리의 유래 (1)

  •  구절리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강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아우라지가 그 유명한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이지만 그런 유래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  구절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골지천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송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협곡과 높은 산을 끼고 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마을과 마을간, 부족과 부족간, 국경과 국경간의 경계선에서 항상 다툼의 현장이 되었던 곳이다. 
  •  강의 북쪽에 위치하다보니 강의북쪽에 위치한 나라의 최전선이 되었고. 그로부터 많은 역사는 시작된다.
  •  우선 아우라지에서 구절리로 오는 쪽은 무지한 협곡에다 높은산이라 아마도 옛날에는 새 이외에는 오지 못했으리라. 십수년 전만해도 가물재고개를 넘어야만 오는곳으로 얼마나 험했는지 웬만히 간큰 운전자가 아니고선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곳이었다.
  •   그러나 북쪽에서 보면 몇곳 능선에만 올라 바라보이는 남쪽은 얼마든지 넓은 지역을 관찰할 수 있고 적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형이다. 누가 보든 천혜의 요충지 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북에 있는 후방군쪽으로 연결된 곳은 비교적 계곡이 넓고 산이 완만하며 쉽게 보급로와 퇴각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많은 지명이 남아 있는데 우선 구절리에는 동 서 남 북 으로 네 개의 덕이 있다. 고비덕, 말두덕, 장두덕, 안반덕이 그것이며 산의 7내지 8부능선 쯤에 위치하며 상당히넓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전방을 잘 관찰할 수 있으며 제법 규모있는 병사들을 주둔 시킬수 있는 곳으로 지금 보면 대대급 이상의 주둔지 였지 않았나 생각 되며 보급로에 해당되는 안반덕 바로 밑에 동추밭이라고 하여 겨울에도 채소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판단되는 곳이 있고, 바로 그 다음에 종량동이 있는데 이곳에는 보급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   그리고 동쪽에 해당되는 고비덕 아랫쪽에 장군 바위와 마장터, 쇠굽는 나들이가 있고 중동부락 남향진 언덕 위에는 확인 할 수 없는 수천개의 무덤이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수도없이널려 있다.
  •  아마도 전쟁터에서 죽거나 사고사한 병사들을 매장한 곳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이것이 그동안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마을이 협소하고 무덤의 숫자가 많고 그 넓이가 어마어마하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무덤에 찾아오는 후손들을 보지 못했던 것과 무덤 위에는 족히 300~ 400년은 되었음직한 소나무 들이 빼곡히 차있다는 것은 먼 옛날의 전쟁 역사를 말해 주는듯 하다.
  •   그렇게 하고 중심부에서 남쪽에 있는 장두덕 안쪽에 갓거리라는 곳이 있는데 말로는 율곡 선생께서 이승대에 공부하러 올때 지나다가 갓을 걸어 놓고 쉬어 갔던 곳이라 하여 갓거리라고 한다지만 전시에 후방에서 병사로 징집되어온 예비 병사들을 이곳에서 군복으로 갈아 입히던 곳이 아니었나 생각되어 진다.  갓을 한번 걸었다고 갓거리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황당한것 같고 언제나 이곳엔 새로운 예비 병사들이 와서 군복을 입으면서 옷은 그대로 입고 그 위에 군복을 걸칠 수는 있지만 갓만은 그대로 쓰고 군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벗어서 이곳 저곳에 걸어 버리다 보니 바람에 날리고 또한 최전방이라 주어가는 민간인도 없고 군인들 뿐이니 갓을 주어갈 사람도 없고 그저 바람에 날려 이곳 저곳에 걸려 있어 아무곳에나 갓이 걸려 있어서 갓거리라고 불린것으로 생각된다.
  •   셀수 없이 많은 지명이 있지만 신기한것은 구절리 중심지보다는 묘지가 있는 고비덕 아래의 수리동 중동의 민간인이 살았던 흔적이 훨씬 많은 것은 그나마도 그곳은 이곳 중에서는 후방에 속하는 곳이라 떠나보낸 병사들의 가족이나 자식,부모들의 면회차 찾아왔다가 몇사람 살았을 수도 있고 군무중 다쳐 후방으로 가지 못할 처지의 불구자들이 살았을 수도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깊은 계곡속에 분잿골,내미끝(내민끝),수위동,상동, 세찌모텡이(세집모퉁이),목넘이,누뚠지(눈둔치),말구뎅이(말구덩이),이씨밭꼴,오리밭꼴,새양봉등  법 사람 냄새가 나는 지명이 여러곳에 산재해 있다.
  •  이것으로 보건데 구절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오래 되었으며 그 지명도 군에 징집된 가족 특히 옛날의 조혼을 생각한다면 나이 어린 신랑과 갓혼인한 신혼 부부의 애절한 이별에 정인을 찾아 가기위해 물어물어 전선으로 찾아오며 애간장을 끓인 곳으로서 찾아가기도 힘들고 도로 집으로 가기도 힘든 실로 애간장을 아홉번 끊고도 남는 곳이라고 붙여진 이름이 변형되어 구절양장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쇠꼽나들이(병장기를 만들거나 수리하던곳),마장터(말을 기르고 훈련 시키던곳)등등 이산골에 어찌 그런 지명이 생길수 있으며 길가다가 쉬느라고 갓을 한번 걸어 놓고 쉬었다 도로 쓰고 갔다고 갓거리가 이름이 되겠는가?
  •  그리고 그 주인없는 많은 무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내가 역사 학자라면 진짜로 규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정선 아리랑의 많은 가사중 가장 대표적인 아우라지 처녀의 대한 사연이 있다.
  •   가사의 전래에 대해 대다수는 강의 남쪽에 사는 사랑하는 총각 처녀가 있었는데 총각이 강건너 북쪽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장마가 져서 못건너 오는바람에 강가에 나와 기다리다 굳어서 처녀상이 되었다고 지금도 아우라지 남쪽 부락 여량에서 건너다본 산기슭에 처녀상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아니다. 나무하러 간다고 갔다가 기다리다 죽을 정도로 안왔다면 나무를 일년을 하는가 아니면 장마가 일년동안 지는가?
  •   그렇다고 사람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나무하러 간사람 장마때문에 못오는데 한두달 일년을 기다린다고 죽기까지 하겠는가 ?? 그건 아니고 어떠한 이유에서건 징용이건, 군역이든 아니면 실제 나무를 하러 갔건 강건너에 있는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다른 집단의 경계선을 넘어 갔다가 적군에게 잡혔든,전사했든,아니면 북쪽으로 끌려 갔던 한두달이 아닌 1년,2년 아니면 훨씬 많은 세월을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여쁜 처녀가 허구한날 강가에 나와 있기에 처녀상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실성해서 매일 강가에 나와 있기 때문이 아닐까?
  •  아마도 이율곡 선생께서 이성대에 와서 공부하고 간 이곳은 그 선생님 시대에는 이미 이 지역에 상당한 평화가 온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그 훨씬 이전시대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생각된다.

     
    노추산이 노나라와 추나라를 따서 지은 지명이라는데 동시대에는 상당히 유명한 곳이 아니였나 생각되어 지며 아마도 설총대사나 율곡선생께서도 그 명성을 듣고 유명한 이 산에서 공부를 하고자 이곳을 찾지 않았겠나 생각되어 진다. 그러한 사실은 역사서의 어딘가에 구절의 역사도 뚜렷이 밝혀질날이 오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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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절리의 유래 (2)

  •  구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할 점이 너무나 많은 곳이다. 이곳은 원래 강원도 명주군 왕산면 구절리였었는데, 광산이 들어오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로 행정구역이 바뀐 곳이다.
  •   구절에서 보면 정선군 여량면 소재지는 불과 4km 지점이고, 왕산면 소재지는 40km가까이 되는 원거리 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왕산면으로 편입되었던 것은 옛날부터 이곳이 북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편입되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관행상 거리의 원근에 관계없이 명주군으로 편입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광산이 들어오는 시점인 196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볼때, 구절리의 인구분포는 협소한 수의동이나 중동쪽이 월등히 많았으며, 지금으로 보아, 굉장히 넓은 현재의 초등학교가 있는 소재지에는 민가가 몇채 되지 않았다는 것도 옛날부터 마을의 형성이 늦어졌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면,
    광산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정확한 인구분포를 보면, 수의동에 해당되는 분잿골에 5가구, 수의동에 3가구, 새양봉에 3가구, 너랫골에 2가구, 세찌모탱이에 4가구, 작은사달에 1가구, 내미끝에 2가구, 사달골에 3가구가 살았으며 중동에 해당되는 지역인 누뚠지에 3가구, 고비덕에 5가구, 말구댕이에 1가구, 중동본동에 21가구가 살았으니, 합계 53가구와 왕산면 고단국민학교, 구절분교가 중동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구절소재지에는 우전탄좌 자리에 1가구, 양지마을에 1가구, 본동에 6가구, 떡갈밭에 1가구, 도합 9가구가 살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구절리의 민간인 분포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   또한 옛날에는 수의동이나 중동은 구절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구절본동은 굳이 하구절이라고 불렀던 것은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인구분포도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확인하고 싶으면 그 당시의 2만 5000분의 1 지도를 확인하면, 가구들의 분포가 정확하게 실려있을 것이다.
  •  또한, 종량동을 지나 동추밭 바로 위부터는 대기리라는 마을이 시작되는데, 이곳은 아마도 병사들의 진퇴시 대기시키는 곳이어서 이렇게 불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요충지이며, 남쪽의 침입자는 막기가 쉽고, 북으로 퇴각하기는 얼마나 쉬우냐 하는것은, 1968년도 울진-삼척 지구 무장공비 침투시 많은 무장공비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우리 군인들도 이곳을 지키다가 구절에서만 무려 1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하였고,
  •  이곳을 통과한 무장공비는 오대산 입구인 유천지역에서 많이 사살된것만 보아도 그들이 이곳을 퇴각로의 시작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또한 우리 군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많은 예비군과 전투경찰, 그리고 시누크헬기로 공수부대 병력을 이틀씩이나 실어날라 이곳 길목을 지킨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그때의 전투에 대한 비사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자세히 올리기로 하겠다.
  •   그것으로 보아, 구절은 옛부터 강 북쪽에 소속된 집단의 가장남단 경계지역으로 접경지역이며 또한 군사적으로 대단한 요충지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남쪽 강건너 주변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여량리 서쪽, 완만한 산기슭에는 지금도 마산재(말을 기르거나 훈련시키던 곳)라는 지명과 중,고등학교 뒷산인 염장봉(소금을 날라다 저장시켜 놓고 사용하였던 곳)이 있는데, 민간인이었다면 소금을 산봉우리에 저장하고 있었을리 만무하며, 산 아래 두었다가 탈취당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산에다가 저장하였던 것이 아닐까?
  • 우연히 들은 이야기지만, 그곳에는 6.25전쟁당시 미군유해 9구도 미군들이 부패 방지를 위해 그곳에 묻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발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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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구절리의 유래 (3)

  •  수년전 정선 남평리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는것을 알았을때,나는 깜짝 놀랐으며, 이곳이 한강 상류지역이라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부족들이 남평이라는 넓은 지역을 만나 상주하였을것으로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강을 거슬러 올라온 부족은 주로 물고기와 농경으로 생활하였을것이고 강릉, 삼척지역에서 발달한 부족들은 오대산을 거쳐 남쪽으로 물고기나 넓은 농경지를 찾아 남하하다가 아우라지 근처에서 두 부족이 충돌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고대의 국가라는 것이 주로 몇 몇 부족이 모인 군장국가 형태로서 부족민의 숫자는 적게는 몇십, 몇백에서 많게는 몇천까지에 이르는 소규모 집단이기 때문에 충분히 잦은 이동과 경계선간의 충돌이 빈번하였으리라 생각한다.
  •   강 남쪽의 부족들은 편안한 농경생활에 정착하고자 했을것이고, 북쪽의 부족들은 힘든 사냥생활보다는 농경지역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으로 수시로 침략하였을것이며, 그것을 막기위하여 여러모로 방어태세를 갖추는 과정에서 점점 더 치열한 싸움을 하였을 것이다.
  •   나는 이미 구절의 역사를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강원도 일대, 주로 양양의 의상대를 비롯하여 고한 정암사의 수마노탑 등을 건설하여 유명해진 의상대사가 노추산에서 수행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의상대사는 설총대사의 아버지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유학을 떠나던 유학승의 신분으로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물을 먹고 국내로 되돌아와 유명해진 것처럼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유명해진 동시대의 훌륭한 대사이고 또한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대사께서 이곳 노추산에 와서 공부를 하여 신라 천년 역사속에서도 3대스승으로 추앙되는 학자였던 것은 이미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도 이 노추산을 상당한 명산으로 생각하고 수행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명성을 듣고 의상대사나 설총선생께서 찾았을 것이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노추산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노나라와 추나라의 첫글자를 따서 설총대사가 지은 것만은 아닌 분명히 다른 뜻이 있으리라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   그 후에도 계속되는 수행자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며, 신라말, 고려초의 도선대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정감록속의 십승지(전쟁이나 기아, 전염병 등으로 부터 안전한 열개의 지역을 우리나라 속에서 선정해놓은 지형)중 제일 마지막 열번째로 치는 곳이 정선현 동북방 상원산과 장록산사이의 분지는 가히 열번째 십승지라 할만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상원산은 구절리에서 북쪽을 보고 가운데는 다락산(산정상이 상당히 평평한 육산으로 산나물이나 약초가 풍부하게 자생할수 있는 지역)이고 좌측은 상원산이며 우측은 노추산이다. 그런것으로 볼때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분지는 구절리를 말하는 것이며 상원산과 장록산(본인은 노추산이라고 추정함)사이에 있는 지형은 이곳 뿐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분들이 이곳을 수차례 드나들며 답사하였을 것이고 여러모로 생각하여 쓴 글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   또한 남면의 거칠현이나 남이산등은 정치를 등진 선비, 고관들이 은거하던 곳이고 또한 정선 전씨의 시조가 정선의 동면 석곡리와 남면 선평리에 와서 안착한 것을 보면 이곳이 우리나라의 그 시대의 역사속에서는 상당히 전화와 여러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상당히 안전한 지역으로 꼽히던 유명한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  좀더 이러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문헌을 찾아 고증을 한다면 정선 뿐만 아니라 특히 구절리가 우리의 역사속에 좀더 뚜렷하게 자리잡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짧은 소견이나마 계속 글을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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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숨겨진 폭포   

  •  구절리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많이 있는데 오늘은 구절리 주민들만이 알고있는 폭포 한 곳을 소개 할까 한다.

     구절리에서 중동천을 따라 쭈욱 올라가다가 보면 사달골 입구가 나온다.우측 계곡으로 가면 수의동으로가는 길인데 지금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문을달아 잠궈 놓았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   여기서 좌측 골짜기를 타고 약 1km쯤 올라가면, 시원스레 내리쏟는 폭포소리가 들리고, 길에서 개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함께 직경 2~30m쯤 되는 소(물이 흐르다가 모여있는 커다란 웅덩이)가 보인다.

 

  • 길에서 내려다 본 역장소.
  •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사진으로만 볼 수가 있다.
  •   이 폭포는 세간에는 역장소라고 알려져있는 곳으로 폭포의 높이는 약 30m쯤 되며, 이곳의 유명한 것은 폭포쪽으로 쳐다보고 좌측에 물에 반쯤 잠긴 동굴이 보이는 것이다. 이 동굴은 얼마나 깊은지 옛날부터 명주꾸리(명주천을 만들기위해 명주를 짤때 가로줄로 꿰는 실의 꾸러미)하나가 다 풀려내려간다는 이야기가 있는곳으로 원래는 굴의 길이가 억장이나 된다하여 억장소라 부르다가 변형되어 역장소가 되었다.

      1981년 여름, 지금은 울산에 가있는 정해철씨와 내가 함께 이 곳에서 수영을 하고 그 전설을 확인해보기위해 마침 주위에 있던 직경 30cm정도 길이 2m정도의 소나무 통나무를 들어서 굴쪽으로 꽂아보았는데 처음에 두번은 부력에 의해 튕겨올라와 밖으로 나왔으나 세번째에는 좀더 힘을 주어 던졌더니 조금 튀어올라 오더니 꼬리를 하늘쪽으로 향하고 네다섯바퀴 빙빙돌다가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얼핏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그대로 뛰쳐왔고 어디로 그 통나무가 나오는지 궁금하여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옛날에 이곳의 물이 어디로나가는지 궁금하여 쌀왕겨를 억장소에 풀어 놓았더니 며칠후 튄물소로 빠저 나왔다고 함)대로 지금의 행복수양관앞의 튄물쏘(물이 튀어 오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 가서 3일을 확인하여 보았으나 통나무를 보지 못하였는데 얼마후 약 10일쯤 지났을때 아우라지 근처의 다리 밑에서 그 통나무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무가 튄물쏘를 통해 강으로 나오지 않았나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구절리를 찾는분들이나 관심있는분들은 한번쯤 찾아가 봄직도 한
    비경중의 비경이다. 위험하니 동굴근처에는 가지 않는것이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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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절에는 아담하고 자그마한 폭포가 또 하나 있다. 그곳을 이야기 하려면 우선 수의동 계곡의 경치부터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  중동을 지나 수의동계곡 입구를 지나 상수도때문에 문을 닫아 놓은 곳을 지나면 서서히 계곡옆으로 기묘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곳의 마지막 민가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쏘 한쪽에 커다란 항아리같은 홈을 가지고 있는 단지쏘가 있고 10여보쯤 가면 항아리를 반쯤 위에서 아래로 잘라서 뉘여놓은 듯한 바위가 있어 단지를 연상시킨다.
  •   쭉 올라가면서 쏘도 많고 기암 절벽도 많은데 한참을 구경하면서 올라가다가 보면 장군바위재 입구가 나오고 그곳에서 우측 으로 30여분 올라가면 고개 정상이 나오는데 그정상에서 좌측 능선을 바라보면 사람의 목을 세워 놓은 듯한 우람한 두상이 있다.
  •   이름하여 장군바위와 장군바위봉이며 그곳에서 좌측 계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시원한 물떨어지는 소리가나면서 눈앞에 펼처지는데 이곳이 이곳 주민들만 알고 있는 폭포 채양폭포이다. 길이는10m가 조금 넘지만 허공에서 곧장 떨어지고 바로 밑에는 폭포에 깍여 만들어진 바위홈이 아주 예쁜 쪽박을 연상시킨다. 계곡 타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 가봄직한 경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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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숨겨진 동굴   

  •  구절리는 심산유곡 절경속에 묻혀있는 많은 비경을 간직한 신비한 마을인것만은 틀림없다. 계속 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갈지 모르지만 이 곳만은 세간에 알려야 겠다고 생각하기에 다시한번 시작한다.
  •   그렇다고 이곳이 알려져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처럼 훼손되고 파괴되는 것을 원치는 않기때문에 위치만 알고 탐사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   이곳 역시 구절리 중동으로 거슬러 올라가 상수원을 보호하기 위한 철대문앞에서 좌회전하여 약 1km쯤 올라가면 역장소 가기 4~500m쯤 전에서 개울 건너를 쳐다보면 커다란 암반이 위에서 부터 10여m 정도 형성된 곳이 있는데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나무에 가려서 입구가 잘 보이지 않고 낙엽이 쌓여 거의 보이지 않는 조그만 동굴입구가 눈에 띌 것이다.
  •   얼핏 보면, 오소리 굴이나 동물들의 동면지로도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사용되기도 한다.
  •   1982년도 초가을, 우리가 이 곳을 처음 탐사하였을때를 상기하여 보면 좁은 입구를 들어가면서 곧장 아래로 3m정도 뚝 떨어지면 바닥에는 고운 흙이 깔려 있고 우측면에 조그만 동굴들이 있어서 동물들이 드나든 발자국이 쭈욱 깔려있다. 이곳의 넓이는 약 4평 정도되고 천장 높이는 10여m정도 된다.
  •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사람이 서서 간신히 들어갈수 있는 곳을 통과해 들어가면 시냇물소리가 졸졸 들리면서 약 3~4평 정도의 공간이 나타나고 온갖 석화와 석순들이 환상적으로 피어있는 사이를 여기저기서 물이 감싸안고 돌아 흐르고 있다.
  •   이곳이 너무나 신비하고 그 아래에는 동물이었는지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식수를 공급했음직한 우물형상의 샘이 고여있는 곳이 있고, 이 곳이 이 동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   이곳을 빠져나와 처음 장소로 다시 나와서 들어온 방향에서 정면으로 2m정도의 높이에 또 다른 동굴이 있는데, 그 곳을 올라가면 약간 아래로 떨어지면서 5평정도의 공간이 나오며 그 곳 우측에는 분명히 사람이 기거했을 만한 폭 1.5m정도, 길이 2m정도의 침상처럼 생긴 바위가 우측벽에 붙어있고 바닥에는 주먹만한 자갈들이 깔려 있는데 그 자갈위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고, 동물들의 뼈와 어쩌면 인골일수도 있는 뼈들이 흩어져 있다.
  •   우리는 이것이 사람이 기거했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 때에는 이 동굴에 주인이 사람이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직선방향으로 작은 통로를 들어가면 또하나의 방이 나오는데, 그 곳의 넓이는 거처하던 동굴의 넓이보다는 조금 작지만 아마도 음식이나 그 외의 생활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정도로 쓰였음직한 느낌이 드는 그러한 동굴이었다.
  •   그 안쪽으로도 계속 동굴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장비와 전문성 부족으로 더 이상의 탐사는 하지 않았으며 다시 나오는길에 2m쯤 되는 언덕을 뛰어내리다가 동료중 한명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6바늘이나 꿰메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  그후 이 곳이 아름아름 소문이나 꽤 여러사람이 드나들며 많이 훼손되고 망가지게 만든것으로 소문을 들었는데 너무도 안타까워서 이곳을 공개해야 하는문제에 대해서 본인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   혹,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그곳에 그런 동굴이 있다는 것만 알고 탐사는 삼가해주시고 꼭 필요해서 가보실분들은 될 수 있으면 그나마도 남아있는 원형을 보존하고 후손과 함께할수 있는 자연을 가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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